배우 최은희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었다

배우 최은희의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었다 원로 배우 최은희가 4월 16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한국배우협회는 그가 이날 오후 5시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최은희는 1950,60년대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배우다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해 ‘새로운 맹서’(1947)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1954년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는 단순한 영화감독 남편의 영화배우 아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영화적 동지로서 ‘신필름’이란 영화제국을 함께 이끌며 ’지옥화‘(1958)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 ‘상록수‘(1961) ‘벙어리 삼룡이’(1964) 등의 영화를 함께 탄생시켰다

1961년 홍성기 감독과 배우 김지미의 ‘춘향전’ vs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의 ‘성춘향’ 대결에서 거둔 승리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스토리 중 하나다 당시 최은희는 직접 배우들의 옷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지옥화’에서 연기한 소냐는 지난 2017년 한국영화 속 최고의 여성캐릭터 중 20위로 기록되기도 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삶은 영화감독과 배우의 삶으로 보기에도 너무 영화적이다 1976년 공식적으로 헤어진 두 사람이 재회한 곳은 북한이었다

1978년 최은희가 북한에 납치되고, 신상옥 감독이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 함께 납북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북한에서도 두 사람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영화제작을 계속했다 최은희는 당시 찍은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기억에 대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 1986년 국제공동제작을 위해 독일로 떠난 이들은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해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후,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6년 사망했다 최은희는 지난 2007년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출간한 바 있으며 ‘신상옥청년영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겪었던 일은 최근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통해 재조명된 바 있다 아래 기사에사 확인할 수 있다

故 김기덕 감독, 영화에 인생 건 남자 “죽어서도 영화감독”

故 김기덕 감독, 영화에 인생 건 남자 "죽어서도 영화 감독" 고 (故) 김기덕 감독은 평생 영화 감독이었고, 세상을 떠난 지금도 여전히 영화 감독이다 1960 년대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화계 원로 김기덕 감독이 7 일 향년 83 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계 관계자에 따르면, 김기덕 감독은 이날 오후 3시 2 분께 폐암으로 결국 눈을 감았 다 김기덕 감독의 삶은 그야말로 영화로 시작해 영화로 끝났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1 년 영화계에 데뷔 한 김기덕 감독은 1977 년 영화 산업에서 은퇴 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쏟아 냈는데, 영화계 에선이시기 그를 한국 영화의 흐름을 바꾼 젊은 감독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역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 (1964)이다 당시 가장 독특하고 성공적인 장르가 멜로 드라마 였는데 맨발의 청춘이 그 중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기덕 감독은 1967 년 SF 괴수 영화의 시초 대 괴수 용가리로 한국 장르 영화의 저변을 확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5 인의 해병 (1961)으로 흔치 않은 전쟁 영화를 각인 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모란이 피기까지는 (1962) 떠날 때는 말없이 (1964) 불타는 청춘 (1966) 섬 마을 선생 (1967) 등 한국의 정서와 시대상이 담겨있는 의미있는 작품을 다수 남겼다 1980 년대 이후 그의 작품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는 영화에 대한 끈을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공연 윤리위원회 영화 · 비디오 심사 위원을 비롯해 대종상 집행 위원과 심사 위원장, 서울 예술 대학 학장, 영상물 등급위원회 위원 등을 지내며 한국 영화 발전에 이바지했다 2011 년에는 부산 국제 영화제를 통해 그의 회고전이 마련돼 모처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했다

당시 가졌던 언론 인터뷰에는 김기덕 감독의 삶과 철학, 영화에 대한 열정 등이 오롯이 남아 있었다 당시 김기덕 감독은 제작 현장을 떠난 지 30 년이 넘었는데 명함에는 여전히 영화 감독이라고 적혀있다 영화를 통해 나는 교수와 대학 학장을 했다며 그렇기에 나의 뿌리는 영화이고, 나는 죽어서도 영화 감독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삶을 함축적으로 풀어 낸 명언이었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 3 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9 일 오전 11시다

강우석 감독 “함께 늙어가는 관객 있기에 내 영화는 여전히 통한다”

강우석 감독 “함께 늙어가는 관객 있기에 내 영화는 여전히 통한다” ㆍ20번째 연출작 ‘고산자, 대동여지도’ 강우석 감독 “함께 늙어가는 관객 있기에 내 영화는 여전히 통한다”

비즈니스맨만이 남은 한국영화계에서 강우석 감독(56)은 여전히 보스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실패한 적도 있었지만, 언행에는 여전히 확신이 가득하고 거침이 없다 연출과 제작을 겸하며 형성된 ‘강우석 사단’이란 말도 건재하다 같은 시기 데뷔한 수많은 감독들 중 여전히 메가폰을 들고 현장을 지키는 이는 강 감독뿐이다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강 감독의 20번째 연출작이다

한국 고지도 중 최고 걸작인 대동여지도의 작자 고산자 김정호의 삶을 그린 영화다 개봉 첫 주 흥행 성적은 예상보다 저조하지만, 최근 만난 강 감독은 “추석 연휴를 거치며 뒷심이 생길 것”이라고 자신했다 – 요즘 관객의 기호에 대해 확신하나 “연출과 제작을 계속해서 리듬은 깨지지 않았다 예전 내 영화 보던 관객들과 내가 같이 늙어간다

이들은 영화 보는 습관이 생긴 상태다 드라마만 좋으면 내 영화는 여전히 통한다” – 언론 시사 당시에는 주연 차승원의 ‘삼시세끼’ 유머나, ‘내비게이션’ 유머가 다소 튄다는 말이 있었다 “이런 유머가 있어서 중·후반의 드라마가 살아난다

유머 없이 지도 만드는 이야기만 제시하면 일반 관객은 지루해한다 초반부의 유머에 웃고 재밌어하다가 중·후반부에 뒤통수 얻어맞는 관객이 있을 것이다 관객이 차승원, 김인권에게 기대하는 유머가 있다 그 기대를 배신하면 안된다”

– 후반부 들어 천주교 박해 당시의 고문, 사형 장면이 나오지만, 등급은 의외로 전체관람가를 받았다 “피가 한 방울도 안 나오게 했다 소품팀이 ‘멀리라도 잘린 목을 둘까요?’라고 묻기에 치우라고 했다 우리 역사에 김정호 같은 사람, 대동여지도 같은 걸작이 있고, 대한민국 풍광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좋겠다 러닝타임도 평소 내 영화보다 짧다(129분)

초등학생, 중학생은 2시간이 집중력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한 장면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의 한 장면 강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을’이다

경찰조차도 더 큰 권력자에게 짓밟히기 일쑤다 김정호도 마찬가지다 대동여지도를 탐내는 권력자 흥선대원군과 안동 김씨 일가 사이에 끼여 곤욕을 치른다 – <고산자, 대동여지도>에서는 강 감독의 많은 영화가 그러하듯 백성을 함부로 여기는 지배계층에 대한 반감이 드러난다 그러나 가정사에 소홀한 김정호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내 영화에서 나쁜 놈은 혼나거나 죽는다 그래서 이야기가 덜 입체적일 수는 있지만… 사람이 나빠도 적당히 나빠야지 <공공의 적>에선 설경구가 그런 대사를 한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넌 죽일 놈이다

’ ” – 김정호는 왜 지도에 집착하나 영화에서 설명이 안된다는 말도 있다 “마지막 대사에 나온다 ‘가슴이 뛰어서’

고산자(古山子)란 호는 김정호 본인이 지었다 ‘옛산의 아들’이란 말처럼 김정호는 그저 물, 산, 길을 좋아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내가 왜 영화를 찍을까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남의 영화 티케팅할 때도 가슴이 뛴다 좋은 영화 보면 질투하는 게 아니라 기쁘다” – 백두산 천지, 합천 황매산, 여수 여자만, 마라도까지 한반도의 절경이 두루 나오는데 영화 초반부에 한꺼번에 스치듯 보여줘서 아쉽다 이야기 중간에 녹여넣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하면 드라마가 섰다 가다 한다 종반부에 독도가 나와 받쳐주니까 영상에 대한 갈증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 바우(김인권)가 광화문 앞에 거대한 대동여지도를 펴놓고 오열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우리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김인권한테 엄청 부담을 줬다 ‘넌 이거만 하면 된다 이거 못하면 배우 그만둬라’ 김정호가 개고생해 그린 지도를 사람들한테 드러내 알 권리를 주장하는 장면이다 울림이 없으면 큰일난다

” – 같은 시기 데뷔해 영화 찍는 이가 거의 없다 “이명세, 박광수, 장선우 감독이 같이 데뷔했다 이명세는 몇 년째 놀고, 박광수는 더 오래 놀고, 장선우는 아예 영화계를 떠났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 다음 이름으로 나온다

내가 왜 원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중견 정도면 괜찮은데… 정지영 감독이 가끔 찍으니까 다행이긴 하다 나도 영화에 미쳐 사니까 이렇게 계속 기회가 온다 언젠가 영화 찍을 머리가 안 나오면 그만둘 것이다

지금은 시나리오 받으면 어떻게 찍을지 감이 온다 만일 글 써주는 대로 찍어야 한다면 그냥 시나리오 작가가 찍는 게 낫지 다음 작품은 1만% 코미디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찍느라 몸과 마음이 너무 피폐해졌다 아직까지 <개그 콘서트> <코미디 빅리그>에 나오는 코미디언도 웃길 자신이 있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삶은 영화감독과 배우의 삶으로 보기에도 너무 영화적이다

"최은희"와 신상옥의 삶은 영화감독과 배우의 삶으로 보기에도 너무 영화적이다 원로 배우 최은희가 4월 16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한국배우협회는 그가 이날 오후 5시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최은희는 1950,60년대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열었던 배우다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해 ‘새로운 맹서’(1947)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1954년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는 단순한 영화감독 남편의 영화배우 아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영화적 동지로서 ‘신필름’이란 영화제국을 함께 이끌며 ’지옥화‘(1958) ‘사랑방손님과 어머니‘(1961) ‘상록수‘(1961) ‘벙어리 삼룡이’(1964) 등의 영화를 함께 탄생시켰다

1961년 홍성기 감독과 배우 김지미의 ‘춘향전’ vs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의 ‘성춘향’ 대결에서 거둔 승리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스토리 중 하나다 당시 최은희는 직접 배우들의 옷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지옥화’에서 연기한 소냐는 지난 2017년 한국영화 속 최고의 여성캐릭터 중 20위로 기록되기도 했다 지옥화의 한 장면 최은희와 신상옥의 삶은 영화감독과 배우의 삶으로 보기에도 너무 영화적이다

1976년 공식적으로 헤어진 두 사람이 재회한 곳은 북한이었다 1978년 최은희가 북한에 납치되고, 신상옥 감독이 그녀를 찾으러 갔다가 함께 납북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북한에서도 두 사람은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영화제작을 계속했다 최은희는 당시 찍은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기억에 대해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였다”고 말한 바 있다 엣나인 제공

이후 1986년 국제공동제작을 위해 독일로 떠난 이들은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해 탈북에 성공했다 이후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후,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신상옥 감독은 지난 2006년 사망했다 최은희는 지난 2007년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출간한 바 있으며 ‘신상옥청년영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겪었던 일은 최근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를 통해 재조명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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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남북을 오가며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배우 겸 감독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소천했다.

[최은희] 남북을 오가며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배우 겸 감독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소천했다 남북을 오가며 영화같은 삶을 살아온 배우 겸 감독 최은희씨가 16일 오후 소천했다

향년 92세 고인(故人·1926~2018년)은 배우이자, 신상옥(1926~2006년) 감독의 아내이며 우리나라의 세 번째 여성 감독이다 고인은 1947년 영화 사랑의 맹서로 데뷔했다 고인은 당시 촬영감독이던 김학성 기사와 만나 혼인신고 없이 결혼했다 고인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게 납치됐다가 구사일생으로 청천강 부근에서 탈출했다

고인은 자신을 흠모하던 신상옥 감독(1952년 악야로 데뷔)을 1953년,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에서 만나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배우 최은희가 1954년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온 마릴린 먼로와 함께 찍은 사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 가운데 한 장면 사진=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쳐 이후 고인은 신 감독과 꿈(1955) 지옥화(1958) 춘희(1959) 로맨스 빠빠(1960) 백사부인(1960) 성춘향(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로맨스 그레이(1963) 등 1976년까지 130여편을 완성했다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있었던 고인은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을 연출했다 이 가운데 배우로도 출연했던 연출작 민며느리로 대종상 여우주연상까지 거머 쥐었다 고인과 신 감독은 대한민국은 물론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도 큰 주목을 받았다 배우 최은희가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가운데), 신상옥 감독(왼쪽)과 함께 촬영한 사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 가운데 한 장면

사진=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쳐 고인은 1973년 신 감독과 이혼했다 고인은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동월 14일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다 당시 고인이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나와서 인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신 감독도 7월에 고인을 찾으러 홍콩에 왔다가 동월 19일 납북됐다

북한으로 끌려간 두 사람은 각각 서로의 생사도 모른채 수차례의 북한 탈출 시도와 좌절, 교화소 생활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83년에서야 재회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부부로 재결합했다 북한에서 고인은 신 감독과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완성했다 이 가운데 영화 소금으로 고인은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고인은 한국인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배우가 됐다

북한에서 활동하던 시절 촬영한 영화 현장 속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2016년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 가운데 한 장면 사진=공식 예고편 유튜브 캡쳐 고인은 신상옥 감독과 1986년 3월 베를린영화제 참석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에 미국 대사관에 진입, 드디어 북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두 사람은 미국으로 망명해 10년 넘게 생활 하다가 1999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고인은 북한 탈출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육성을 담은 녹음기를 가지고 왔고 이는 2016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다큐멘터리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를 통해 고인은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고, 2002년 뮤지컬 크레이즈 포 유를 기획·제작했 2006년 남편 신상옥 감독의 타계 후 고인은 2007년에는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을 펴냈다 이 자서전은 이후 로버트 캐넌과 로스 아담 감독의 다큐멘터리로 부활했다 고인의 유족은 신정균(영화감독)·상균(미국거주)·명희·승리씨 등 2남2녀다

고인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최은희] 그야말로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

[최은희] 그야말로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 최은희, 하늘나라 별이 되다

남편 신상옥과 납북됐다 탈출, 영화같은 삶 주수정 기자 | loveyellow@daum 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큰 이미지 보기

▲ 최은희와 남편 신상옥 감독의 납북과 북한 생활을 담은 다큐영화 연인과 독재자 2006년 세계최대 독립영화제인 샌댄스영화제에 초청됐다/출처=다음영화 [포쓰저널=주수정 기자] 영화 배우 최은희가 16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최은희는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1950~7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로 명성을 떨쳤다 영화 동지이자 남편인 신상옥 감독은 2년 전 먼저 별세했다 최은희는 2010년부터 신장 질환으로 투병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 신상옥 감독을 기리는 신필름 예술영화제 개막식에 등장한 것이 최은희의 공식석상 마지막 모습이었다 최은희는 단순한 여배우를 넘어 분단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은, 그야말로 영화같은 삶을 살았다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은 1978년 6개월 시차로 잇따라 북한에 납치됐다 납치와 북한 체류 당시 상황을 담은 신상옥 감독의 연인과 독재자에는 두 분이 꼭 필요하니 데려오라고 납치를 지시했다는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육성이 나온다 김정일은 영화 제작을 직접 지휘할 정도로 영화광이자 이를 통한 대중 선전선동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일 위원장은 북으로 납치돼 온 최은희에게 최 선생이라고 부르며 깍듯하게 대했고 최은희의 생일에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부인과 아들 김정남을 소개하기도 했다고 최은희는 귀국 후 회상했다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부부는 북한에서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두 사람은 납치 8년만에 오스트리아에서 극적으로 탈출해 미국에서 망명했다가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최은희는 귀국 후 남한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 이야기를 믿지 않을 테니 증거가 필요하다는 남편의 말을 듣고 몰래 김정일의 육성을 녹음했다고 설명했다 다큐영화 연인과 독재자는 2006년 세계 최대 독립영화제인 샌댄스영화제에 초청작으로 출품되기도 했다 최은희는 1947년 새로운 맹서를 통해 스크린에 데뷔한 뒤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등의 작품을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53년에는 신상옥 감독과 결혼했다

이후 이혼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지막까지 부부이자 연인으로 해로했다 최은희는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했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5년 북한 체류 당시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소금은 모스크바영화제 출품 당시 소련 매스컴에서 “푸도프킨의 어머니보다 뛰어나다”는 극찬을 받았다 최은희의 빈소는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19일 오전이다 장지는 안성천주교공원묘지다 최은희 아들인 영화배우 신정균 씨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야 한다는 영화계 의견이 많았지만, 어머님 생전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전했다

최은희 별세 신정균 감독 영화같은 삶 | Super Star

최은희 별세 신정균 감독 영화같은 삶  배우 겸 영화감독 최은희 씨가 어제 별세 하셨습니다 故 최은희의 장남 신정균 감독은 “어머니가 오늘 오후 병원에 신장투석을 받으러 가셨다가 임종하셨다”고 밝혔는데요

그녀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고인은 1942년 연극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후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스타 여배우가 됩니다 대표작으로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이 있는데 1950-1960년대 한국의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립니다 그녀는 1953년 영화 코리아를 통해 신상옥 감독을 만나고 그들은 1954년 결혼을 하는데요 신상옥 감독은 다른 여배우 오수미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최은희와 결혼한 상태에서 오수미는 첫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최은희는 처음 신감독의 외도 사실을 알고 오수미가 신감독과의 사이에서 첫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만 해도 이를 있는 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고 예전 한 프로그램에서 털어 놓았는데요 둘째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는 아버지 어머니 두 사람 아래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혼을 결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다가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데요 최은희는 1978년 홍콩으로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됩니다

그리고 최은희 행방을 찾으러 홍콩을 갔던 신상옥 감독도 같은 해 납치된 뒤 5년이 지난 1983년 북한에서 재회했다고 합니다  최은희와 신정균 감독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오스트리아 빈 방문 중 미국 대사관으로 진입해 망명을 합니다 

최은희 자녀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해 합니다 배우 최은희와 신상옥 감독은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아이 둘을 입양해 키웠습니다 그리고 북한에서 탈출한 뒤 오오수미 자녀들을 입양합니다 오수미는 1992년 하와이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지난 2006년 고 신상옥 영화감독의 딸 신승리씨가 결혼 할 때 사진작가 김중만씨가 대부 자격으로 신부 손을 잡고 입장하기도 했죠

  신정균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입양된 아들이었다는 것을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됐다”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이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때쯤 부모님이 실종되셨다 당시 신문 1면에 부모님의 실종 기사가 났는데, 양아들 정균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 너무 충격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